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가리타 테레사 (문단 편집) === 어린 시절 === || [[파일:1653년 2세 때의 마르가리타 테레사.jpg|width=100%]] || [[파일:1656년 5세 때의 마르가리타 테레사.jpg|width=100%]] || || [[파일:1659년 8세 때의 마르가리타 테레사.jpg|width=100%]] || [[파일:1660년 9살 때의 마르가리타 테레사.jpg|width=100%]] ||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1651년 7월 12일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와 조카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부의 나이 차는 무려 29살이었다. 그녀의 친조부모인 스페인 왕 [[펠리페 3세]]와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는 서로 육촌, 외조부모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 3세]]와 스페인의 인판타 마리아 안나(펠리페 4세의 여동생, 마르가리타의 고모)로 사촌이다. 어머니 마리아나는 원래 [[펠리페 4세]]의 아들인 아스투리아스 공(왕세자) 발타사르 카를로스 왕자와 약혼했다. 왕은 후계자가 있으니 굳이 재혼할 생각이 없었지만 1646년 발타사르 카를로스 왕자가 사망하면서 펠리페 4세는 하루빨리 스페인 왕위를 계승할 새로운 남자 후계자를 낳아야 했기에, 자신의 외조카(여동생 마리아 안나의 딸)이자 아들의 약혼녀였던 마리아나와 결혼했다. 그러나 철저히 후사를 보기 위한 목적으로만 선택한 신부였기에 펠리페는 아내를 어린 조카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마르가리타의 형제로는 펠리페 4세와 전 왕비[[https://en.wikipedia.org/wiki/Elisabeth_of_France_(1602%E2%80%931644)|프랑스의 엘리자베트]][* 스페인식으론 이사벨. [[앙리 4세]]와 [[마리 드 메디시스]]의 딸.]의 자녀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루이 14세]]와 결혼하면서 프랑스 왕비가 된 이복 언니 [[마리아 테레사(스페인)|인판타 마리아 테레사]], 훗날 [[압스부르고 왕조|스페인계 합스부르크]]의 마지막 국왕이 되는 친동생 [[카를로스 2세]]가 있었다. 펠리페 4세와 마리아나 사이에서 5명의 자녀(3남 2녀)가 더 태어났지만, 성인 때까지 살아남은 자녀는 마르가리타 테레사와 카를로스 2세 뿐이었다. 스페인의 인판타 마르가리타는 남동생들과 달리 태어날 때부터 심각한 건강 문제와 장애[* 부모부터가 삼촌-조카 관계였고 [[카스티야 연합 왕국]]-[[아라곤 왕국]]의 트라스타마라 왕조, [[압스부르고 왕조|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 포르투갈 왕국의 아비스 왕조 등 선대로부터 이어져 온 근친혼이 막 겹친 결과였다.]는 없었다. 어릴 때 심각한 병을 앓고도 살아남았다. 동시대 사람들에 따르면 마르가리타는 매력적인 외모와 활기찬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마르가리타의 부모님과 가까운 친구들은 그녀를 "작은 천사"라고 불렀다. 그녀는 마드리드 레알 알카사르에 있는 왕비의 방에서 많은 하녀와 하인들에게 둘러싸여 자랐다. 마르가리타는 특히 사탕을 좋아했는데 치아의 건강을 돌보는 의사들에게서 끊임없이 사탕을 숨겼다고 한다. 아버지 [[펠리페 4세]]와 외할아버지 [[페르디난트 3세]]는 이 아이를 깊이 사랑했고, 펠리페 4세는 사석에서 그녀를 "나의 기쁨"이라고 불렀다. 동시에 마르가리타는 마드리드 궁정의 엄격한 예절에 따라 양육되었고 좋은 교육을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